경주이야기



경주이야기 남산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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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큰딸로태어나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 27대 선덕여왕(632~647) 여성의 신분에도 김유신과 김춘추 같은 영웅호걸을 거느리며 신라가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하고 첨성대,분황사, 황룡사 구층목탑을 건축하는등 신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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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선조 25년(1592) 부산첨사로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김호가 살았던 집이다. 17세기전후에 세운 것으로 추정하며 집터는 신라시대 절터였다는 설이 있는데,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여러 석조물이 있고 마당의 우물돌은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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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낭산 서쪽 기슭의 바위면에 삼존불(三尊佛)이 조각되어 있는데, 표면이 거칠고 균열이 심한 상태이다. 가운데에는 머리광배와 몸광배를 갖춘 본존불이 있고, 양 옆으로 협시불이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살이 찐 얼굴은 광대뼈가 튀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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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나 법회 등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사찰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성덕을 표시하는 기를 당(幢)이라 하며, 이를 달아매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이 장대를 양옆에서 지탱하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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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동쪽 관문에 해당하는 명활산과 낭산사이에 자리한 너른 들판이 보문평야이다. 절터의 대부분이 넓은 논으로 이용되고 있는데, 보문동 마을 앞 들판에 석조, 금당터, 목탑터, 석등받침돌 등이 남아있다. 벼가 자라고 있는계절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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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인 설총의 묘이다. 아버지는 원효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며 출생시기는 태종무열왕대인 654∼660년 사이로 짐작된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에 널리 능통하였다고 한다. 신라 유학의 종주가 되었으며, 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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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하지도 않다. 아무런 시설 없이둥글게 흙을 쌓은 평이한 능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왕릉으로서의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한 느낌으로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주변의 논밭이며, 큰 소나무와 주변의 고목들이 봉분과어우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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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소왕 1년(692)에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황복사지석탑’ 이라 불리기도 한다. 706년에 효소왕의 뒤를 이은 성덕왕이 탑 안에 사리와 불상등을 넣어, 두 선왕의 명복을 빌고왕실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이처럼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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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없던 진평왕의 큰딸로태어나 신라 최초의 여왕이 된 27대 선덕여왕(632~647) 여성의 신분에도 김유신과 김춘추 같은 영웅호걸을 거느리며 신라가 삼국통일의 토대를 마련하고 첨성대,분황사, 황룡사 구층목탑을 건축하는등 신라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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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천왕사는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군사를 물리치고자 문무왕 때 세운 절이다. 호국 사찰로 그사세가 당당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절터에서는 금당터와 목탑이 있었던 자리를 확인할수 있으며, 귀부 2기와 당간지주를 볼수 있다. 통일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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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이름난 절이었으나, 지금은 당간지주 하나, 금당터와 목탑의 초석이 남아있다. 30대 문무왕, 사천왕사 건립 무렵의일이다. 신라공격에 나선 당나라 배들이 번번히 침몰하자 당 고종은 불모로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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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시내 중심가는 물론이요 야산자락이나 구릉에는 반드시 귀족이나 왕릉으로 여겨지는 무덤들이 자리한다. 낭산 자락 아래에도 왕릉들이 즐비하다. 신문왕릉, 효공왕릉, 진평왕릉 676년 삼국 통일을 이룩한 문무왕의 아들이 31대 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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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공왕은 49대 헌강왕이 서자로 태어나 51대 진성여왕에 의해 태자로 봉해지고 이어 왕위를 물려 받았다. 헌강왕이 사냥을 나가 만난 미모의 여인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52대 효공왕(897~912) 재위 시절은 신라왕실의 권위가 떨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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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김우징이고 43대 희강왕의 사촌동생이다. 839년 청해진 대사장보고의 도움을 받아 44대 민애왕을 죽이고 45대 왕으로 왕위에 올랐으나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병으로 죽었다. 민애왕을 해칠때 이에 반대한 이홍을 죽였는데, 꿈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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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가 허공에 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해서 부석이라 불리는 남산부석은 버선을 거꾸로 세워 놓은 모양같다 해서 버선바위 라고도 한다. 국사골인 이곳의 바위들은 그 모양이 기기묘묘해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불국토를 꿈꾸던 신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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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를 약간 깍아내 둥근 감실 형태를 만들고 그 안에 마애보살상을 모셨다. 마애보살상은 연꽃대좌 위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있는데, 마치 구름을 타고 유희하는 듯하다. 유난히 편안해보이는 것은 대부분결가부좌하는 석불상과 달리 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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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다란 암봉과 소나무 푸른하늘, 그앞에 반구형의 바위가 하나 있고, 앞에는덩그러니 놓인 바위하나가 있따. 한석공이 곰곰이 생가가다 정으로 바위를 꺠기 시작해따. 얼마쯤 지났을까 덩그러니 놓인 바위는 면마다 부처님이 자리를 잡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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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의석탑은 대웅전 앞에 똑같은 삼층석탑 두기를 나란히 놓는(쌍탑) 방식 일반적이다. 그런데 불국사의 쌍탑(석가탑과 다보탑)은 그렇지 않다. 의도적으로 대칭적인구조를 깨뜨리면서 새로운 조화를 추구한다고 할까 남산리삼층석탑도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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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마을 한가운데에 삼층석탑 두 기가 있고 동쪽에 아담한 연못이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신라 소지왕 10년(488)에 왕이 남산 기슭에 있던 ‘천천정’이라는 정자로 가고 있을 때,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 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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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루는데 큰 공헌을 한 태종무열왕,문무왕,김유신의 영정을 모시고 그 정신을이어 남북 통일도 이루자는 염원으로 1977년 건립되었다. 초 .중등학생들이 경주수학여행의필수 코스로 짜여진다. 통일전에 서 남산을 오르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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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강왕은 48대 정문왕의둘쨰아들이며, 49대 헌강왕의 동생으로 신라 50대 왕(886~887)에 올랐다. 그러나 병으로 죽어 왕위에 있던 기간은 1년밖에 되지 않는다. 병상에 있던 정강왕은 ‘불행히 나의 뒤를 이을 자식이 없으니 ,선덕여왕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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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라벌의 번영을 이야기 할때 17만8,936호 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흔히 인용된다. 이떄가 태평성대였던 49대 헌강왕(875~886) 시절이다. 헌강왕이 왕위에 있는 동안 신라는 거리마다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정도로 태평성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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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화랑교육원 내에 자리잡고 있는 석조 감실로, 불상을 모셔두던 곳이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밑받침돌 위로 양쪽 옆면과 뒷면을 높이 세운 뒤 위로 덮개돌을 얹어 앞쪽을 트이게 한 모습이다. 그 안에는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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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사 석불좌상’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보리사는 근래에 건물을 지어 세웠다 해도 현재 남산에 있는 절 가운데 규모가 가장크다. <삼국유사>에서 49대 헌강왕릉과 50대 정강왕릉의위치를 말할 때 ‘보리사의 동남쪽에 있다’라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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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에는 50여개의골짜기가 있고, 그안에 수많은 불탑과 불상, 절터가 있다. 탑곡의 ‘부처바위’라 불리는 탑곡마애조상군은 그 숱한 남산의 유적과 유물가운데에서도 가장 흥미롭고 독특한 유적이다. 높이가 10m, 둘레가 40m 쯤 되는 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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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은 다단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바위산이다. 다루기쉽지 않은 암질이라는 이야기다. 석굴사원으로 유명한 돈황에는 500여 개의 석굴과 1,400 여기의 불상이 있는데, 이곳은 푸석푸석한 모래 바위 . 석굴사원을 조성하기에 적합한 자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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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버린 연꽃좌대, 불두도 없이 바닥에 내 려앉은 불상, 조각나 흩어진 배 모양의 광배.. 열암곡석불좌상의 모습이다. 어딘가에 불두가 있어서, 짝을 맞춘다면, 남산에서는 제일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는 미륵곡 보리사 석불좌상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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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전역에서도 손꼽히는 큰 사찰이었던 용장사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머리 부분은 없어졌고 손과 몸체 일부가 남아 있는데 대좌에 비해서 불상은 작은 편이다. 목에는 3줄의 뚜렷한 삼도(三道)가 있고 어깨는 넓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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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남산 용장사지석불좌상(보물 제187호)의 뒤쪽 바위벽에 새긴 마애여래좌상이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원만한 얼굴에는 온화한 미소를 짓고 있다. 양 어깨에 걸쳐 내린 옷에는 평행선으로 이루어진 잔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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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릉에서 개울을 따라 계곡으로 약 300m쯤 가면 길 옆 바위 위에 머리 없는 석불좌상(石佛坐像)이 앉아 계신다. 현재 높이가 1.6m되고 무릎 너비가 1.56m되는 큰 좌불이다. 근년까지도 계곡에 묻혀 있던 것을 파내어 지금 장소에 앉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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