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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역사는 남산에서 시작하여 남산에서 끝맺었다'고 한다.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에 등장하는 '나정'과 신라 55대 경애왕이 견훤에게 생포되어 변을 당했다는 '포석정' 이 남산에 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우기 전 여섯고을의 시조우두머리들에게 제사지내는 양산재, 신라최초의 궁궐터였던 창림사,신라초기왕릉인 오릉까지 모두 지척이다. 포석정 일대는 왕이 행차했을때 머무는 이궁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술잔을 띄우면 술잔이 물길을 따라 흐르며 돌았다는 구불구불한 모양의 석조 구조물만이 남아있다. 석조 구조물은 전복의 구불구불한 모양을 닮았으며, 여기에 있던 정자를 포석정이라 하였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49대 헌강왕(875~886)이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다고 하며, 55대 경애왕(924~927)이 이곳에서 노래와 춤을 즐기다 견휀이 처들어와 혼비백산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나 최근에는 ‘견휀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음력 11월의 추운 겨울에 과연 그렇게 질펀하게 놀수 있었을까’ 라는의문이 제기되면서, 포석정이 단순히 유희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순국한 사람을 기리던곳 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원래 물을 붓는자리에 거북이처럼 생긴 돌이 있었지만 19세기말 누군가가 안동으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추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포석’이라는 명문이 새긴 기와가 발견되었으니,아마도 원래 건물이 있었을것이다.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듸워놓고 술잔을 주고 받으며 즐기던 인공수로 유구(수로의 길이는 22m, 포석형 구간은 약 18m)만 남아 있는 포석정,포석정이 언제 만들어 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때 남산신이 임금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 여러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뿐이다, 하여 오랫동안이곳이 왕실 사람들의 향락을 위한곳으로 알려져 왔다.
근래포석정 발굴조사중 포석(砲石) 이라 새겨진 기와가 나와, 포석정 주변에 이 기와를 사용했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여러 건축 터는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다. 포석정 동북쪽에 배성못자리가 있는데, 그 못이 포석정 수원지라 전하며, 북쪽 개울을 건너 대나무밭 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이궁터라고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했을때 머무는 별궁을 가르키는 말이다. 근래에는 포석정이 단순한 풍류를 즐기기 위한 오락시설이 아니라 종교적인 제사사가 행해지던 신성한 장소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있다.


포석정의 회돌이 현상, 유상곡수
유상곡수는 중국과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하지만 포석정은 중국이나 일본 것과는 달리 아주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유상곡수 터는 물이 그냥 흘러가는데 포석정은 술잔이 물길의 굽은 부분과 굴곡진 부분에 오면 뱅뱅 돌거나 몸춘다. 이처럼 술잔의 물의 흐름과 반대로 회전하는 것을 ‘회돌이 현상’ 이라고 한다.
포석정의 수로는 그 형태가 구불구불하고 폭이 일정하지 않다. 벽면과 바닥도 기울기가 다르게 깍여 있다. 이런 불규칙성이 물의 흐름을 다양하게 만든다. 이때 수로를 따라 술잔이 흐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수로와 물의 흐름이 불규칙해 잔의 무게, 술의양 ,술잔을 놓는 위치에 따라 그 흐르는 속도와 멈추는 지점이 변하는 것이다. 물 흐름에 관련된 이와 같은 불규칙성은 자연에서 흔히 볼수 있는 현상이다. 포석정은 이같은 자연현상에 대해 신라인들의 지속적인 관찰과 분석의 결과물이다. <역사스페셜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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