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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지 (사적 제6호)
"텅 빈 충만"이라는 말을 실감하고 싶은 이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곳! 황룡사가 계획된것은 진흥왕(540~576) 때 일이다. 불교를 받아 들인 법흥왕이후 신라 왕들은  불교에 심취했다. 진흥왕은 말년에 스스로 머리를 깍고 승려 처럼 생활했으며, 왕비또한 비구니가 되었을 정도이다.

진흥왕이 새로이 궁궐을 지으려 하였는데, 마침 이곳에 황룡이 나타나자 절로 고쳐 지으면서 절이름이 "화룡사"가 되었다. 왕의 궁궐이 아니라 부처의궁궐이 된 셈이다.
경내만 해도 총 2만 4천여 평이나 되는 신라 최대 규모의 사팡이었고,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종으로 제일 큰 성덕대왕신종보다 4배나 큰 대종이 있었으며,건물로 따져 20층은 족히 넘는 높이 82m의 9층 목탑, 약 5m의 장육존상, 실제 같앙서 새들이 날아와 벽에 부딧히곤 했다는 솔거의 노송 벽화....,규모가 이러하니 진흥왕 때 완성을 보지 못한 거이 당연하지 않았겠는가.
선덕여왕(632-647)에 이르러서야,  4대 왕에 걸쳐 93년 만에 완공되었다. 이후  신라 역대 왕이 이고에서 친히 불사에 참여하였고, 외국사신도 자주 와서 불상에 예배하였다.
그 후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황룡사는 매우 번성한 사찰이었으나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군의 침입때 불타버리고 말았다. 지금은 비록 남은 것이 초석뿐이지만,  이  초석으로인해 황룡사는 더 웅장하고 화려해 보인다.
상상하는즐거움이 실물을 보지 못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고 누가 자신있게 말할수 있을까.

황룡사지 출토유물
신라최대의 사찰 그러나 절은 사라지고 절터만 남았다. 그러나 옛 건물 초석들은  그 어느 절보다 잘 남아 있다. 사찰은  늪지를 매립한 위에 세워졌으며, 안북 방향에 일렬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배치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구층목탑지에서 발견된 백자 항아리는 당나라의 작품으로 밝혀져 당시 문물 교류를 알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높이 182cm, 최대 너비 105cm 되는 대형 치미는 황룡사 규모가 상당했음을 말해주고 있다.

 

황룡사의 노송벽화 -솔거-
                      양주동
솔거는 삼국시대를 대표하는 우리 겨레 최고의 명장으로서 <삼국사기>에 오른 유일한 화가인 까닭에  오래전부터그의 이름이 만 사람에게 칭송, 추앙되어 왔다. 그러나 <삼국사기> 열전에 실린 그의 전기는 다음과 같이 매우 간단한 것이다. 솔거는 신라 사람이데, 출신이 한미하여  그족계를 알 수 없다. 나면서부터 그림을 잘하였으며, 일찍이 황룡사 벽에 노송을 그렸는데 줄기가 비늘마냥 쭈글쭈글하고 가지와 잎이 서리고 얼기설기하여 까마귀, 솔개, 제비, 참새들이 가금 바라보고 날아들아가 마주쳐서 미끄러져 떨어지곤 했다, 세월이 오래 되어 색깔이  흐려지매 절의 중이 단처응로 기웠더니, 까마귀와  참새가 다시는 이르지 않았다.  또 겨주 분황사의 <관음보살>과 진주 단속사의<유마상>이 그의 필적인데, 세상에 전하여 신화라 한다.


황룡사구층목탑과 아비지전설
중국에 있을때 자장은 한 신령스러운 사람을 만나 "본국에 돌아가 황룡사 안에 9층 탑을 세우면 동방의 아홉나라가 조공해올 것이요, 나라가 평안할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귀국한 자장은 백제의 장인이 었던 이바지를 초청하여 황룡사에 9층 목탑을 세우게 했다. 아비지는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조국인 백제가 망하는 꿈을 꾸었다. 이에 아비지가 일을 멈추자,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더니 노승과 장사 한 사람이 나타나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아비지는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탑을 완성시켰다.
 황룡사구층목탑의 건립이 삼국 통일을 상징하는데  의미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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